다음 링크는 한동안 일부 게임 개발 관련 커뮤니티에 광풍을 불고왔던 토론 게시물입니다..
(링크) 기획자 없는 게임 개발은 가능할까?
만약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굳이 링크를 클릭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관점에선 약간 삐뚤어진 발제에서 시작해서 서로간에 가시돋힌 공방을 주고 받다가 흐지부지 끝난 토론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윗 글에서 다루어진 논의들은 대부분 엇갈려 있어서 별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기획, 프로그램, 그래픽 중에 어느 한 파트라도 허술한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제대로 된 게임이 나올수가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보기에 업계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관련해서 한가지만 짚어볼까 합니다.
기획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 누구의 작업이 잘못된 채로 진행됐을때 가장 큰 복구 비용이 발생할까요?
정답은, 시기적으로 먼저 작업하는 사람의 결과물이 잘못될수록, 이후의 작업이 크게 의존하는 작업물이 잘못될수록 복구 비용이 커지게 됩니다. 윗 글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하는 작업인가가 아니라 언제 하는 작업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앞에서 하는 작업은 나중에 하는 작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특히 프로젝트의 가장 초기에 하는 작업들은 전체 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하는 작업이 되므로 더 크게 의존하는 작업이 됩니다. 기획자가 성토의 대상이 된것은 기획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기획자가 가장 먼저 작업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경우를 다른 포지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모두 의존하는 핵심 공통 모듈을 만드는 프로그래머나 다른 디자이너들이 모두 의존하는 원화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도 비슷한 정도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게임 개발의 전체 프로세스를 감안하면 기획자의 책임이 가장 큰 것임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이 지금과 같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건데, "대본이 나오면 그대로 찍을 수 있게 되면서" 라고 하더군요. 그 이전에는 감독이 느낌대로 찍으니 예산을 정확히 세울수가 없었는데, 90년대가 되면서 대본이 나오면 대본대로 예산을 잡아서 찍고, 실제로 예산을 집행해보면 처음에 세웠던 예산에서 몇% 범위의 오차 안에서 제작이 되면서 산업이라고 불릴만한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 인터뷰 원문이 어딨는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찾으면 추가하겠습니다) 감독이 느낌대로 찍느라 예산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니, 어디서 들어본 얘기같지 않습니까? 결국 게임도 산업이 되려면 대본이 나오면 그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수준까지 가야한다고 봅니다. 처음에 예산을 세우면 그 예산의 몇% 범위의 오차 안에서 제작이 완료되어야 산업이라고 부를만한 수준이 되는겁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더더욱 자본에 종속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지 않으면 모험 자본이 아닌 정상적인 자본은 게임업게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속성을 지닌 대형 자본들도 게임업계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결국엔 한탕을 노리는 자본들만 들어오는 뜨내기판 야바위 시장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가려면 기획이 더 단단해지는 수밖에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프로그램이나 그래픽은 정량적인 작업입니다. 프로그램은 매니지먼트 방법론도 있고 디자인은 작업량을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획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화 한편 찍으려면 아무런 결과물 없이 대본 하나만 2년을 쓴다고 하는데, 기획 파트에서도 이런 정도의 사전 작업 방식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기획 하나 받으면 다른 파트에서 아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그냥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개발이 완료되는 수준의 기획이 나와야 이걸로 정확한 예산을 세울 수 있고 게임이 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대다수의 개발사들에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플레이해보고 재미없다 싶으면 버리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는 trial & error 방식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있고, 이러한 개발 방식에 맞추어진 현재의 기획 기법으로는 산업화가 가능한 수준의 기획이 나올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획을 하시는 분들의 목표는 영화 대본처럼 정밀한 수준의 기획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기획자들은 계속 불신을 받을 수 밖에 없을테고, 게임 산업도 야바위판을 벗어날 수가 없을겁니다. 좋든싫든 원했든 원하지않았든, 현재 게임 업계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동력은 기획기법의 발전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기획기법이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요? 재미는 불분명한 요소이므로 아예 프로토타이핑을 하지 않고 기획할수는 없지만, 프로토타입을 여러사람이 달라붙어서 여러번 만든다는건 비용과 시간, 개발팀의 사기 면에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조엘 온 소프트웨어'를 보면 넷스케잎이 시장에서 밀려나게 된 원인으로 소스 코드를 갈아엎은점을 꼽고 있는데, 프로토타입을 직접 만들고 그 소스를 갈아엎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기획팀에게는 개발 과정의 진전일지라도 프로그램팀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됩니다. 따라서 프로토타입을 만들때는 가능한한 프로토타입을 프로그램팀이 직접 개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요즘엔 많은 게임들이 MOD 툴을 공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툴들을 이용해서 스크립트를 작성하여 룰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기획요소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프로토타입을 만들때는 쉽게 만들고 확실히 버린다는 생각을 갖고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발 방식에 가장 적합한 것이 MOD입니다. 그러므로 기획팀 안에 원활한 프로토타이핑을 위해 몇가지 MOD툴을 다룰 줄 아는 스크립터가 한명은 포함되어야 하고, 기획팀이 자체적으로 프로토타이핑을 상당부분 해결하는 방식으로 가야한다고 봅니다. 즉, 초기 기획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프로토타이핑 자체도 기획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럼 프로그램팀과 디자인팀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 기획의 틀이 잡히기 전에는 해당 프로젝트에 속하는 프로그램팀과 디자인팀을 아예 구성하지 않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델입니다. 기획팀이 스크립트를 이용한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기획을 고정한 후에 개발팀을 확충해 나가는 방식으로 팀의 인원수를 적정하게 유지하고 추후의 개발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제 생각엔 가능할것 같은데, 혹시 이미 이렇게 하고 있는 회사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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