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윌리엄 허트의 부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배우라, 뭔가 한 시대의 종막을 보는 것 같아서 몇 자 적게 되네요. 최근 관객들에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로스 장군으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윌리엄 허트는 1980년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었습니다. 윌리엄 허트의 1980년대 필모그래피는 양과 질 모두에서 거의 미친 수준이라서, 뭐랄까, 당시 느낌으로는 헐리웃 역사에 남을 연기파 배우들의 계보를 이을 것만 같았어요. 헐리웃 영화의 주류 장르가 드라마이던 시절이었고, 배우의 이미지나 연기가 불안정한 지식인 역에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에, 1980년대 그의 출연작들은 죄다 방황하는 지식인을 섬세하게 다루는 뛰어난 영화들이었어요. 그러다 헐리웃 영화의 주류가 액션으로 옮겨가는 1990년대가 오면서 무언가에 홀린듯 순식간에 인기가 가라앉습니다. 헐리웃이 더이상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원하지 않게 된거죠. 윌리엄 허트의 뒤를 이어 비슷한 듯 다른, 다소 변태적인 꽃미남 지식인 느낌으로 주류 배우로 부상했던 제임스 스페이더도 액션 영화로 트렌드가 바뀐 나머지 짧은 전성기 이후 같이 가라앉았던 기억도 나네요. 이후 제임스 스페이더는 장기를 살려 변태적인 수다쟁이 변호사 역으로 TV에서 부활하게 되고 계속해서 그런 역을 맡아가고 있지만요.
이후 윌리엄 허트의 필모는 그다지 눈에 띠지 않습니다. 헐리웃 영화의 트랜드가 액션을 거쳐 다시 SF로 옮겨간 후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캐스팅 되어 간간히 조연으로 등장했을 뿐 다시는 80년대의 영광을 찾을 수 없었죠. 마블은 자기들의 SF 영화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아카데미 상을 받은 현재나 과거의 명배우/명감독들을 자주 기용하고 있는데,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자(거미 여인의 키스 Kiss of the Spider Woman, 1985)이자 80년대 남우주연상 단골 후보였던 윌리엄 허트도 그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우연한 여행자(The Accidental Tourist, 1988)와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 1986)입니다. 이 1985~1988의 4년동안 윌리엄 허트가 출연한 영화들이 다 말도 안되게 훌륭한 작품들이에요. 우연한 여행자는 두어해 전에 다시 봤는데, 요즘 기준으로 봐도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지나 데이비스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게 되는데, 이후 지나 데이비스 마저 90년대의 액션 영화 트렌드를 거스르지 못하고 도전했다 폭망하고 말죠. 80년대에 드라마 장르에서 명연기를 보여줬던 배우들이 죄다 액션 영화에 도전했다 나가 떨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러한 트렌드의 강력함과 개인의 무력함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최근에는 그의 사생활 문제나 미투도 드러나게 되면서 왠지 추모 분위기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80년대 그가 찍었던 미친듯이 좋은 영화들을 돌이켜 보면 그의 부고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