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아주 친숙한 두 개의 서사 구조를 결합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정석적인 이야기에 약자의 입장에서 핍박 받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노력하다 각성을 통해 자신을 뛰어넘어 억압을 가볍게 물리치는 카타르시스 폭발하는 영웅서사가 결합된 구조죠. 초반부의 중심축은 미스터리에 있고 후반부의 중심축은 영웅서사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스터리는 초반부가 넘어가면서 쉽게 풀리고, 후반부의 영웅서사는 주로 자신을 억압하던 상대를 가볍게 제압하는 카타르시스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어느 면으로 봐도 제작진은 애초에 이야기를 깊이 있게 전개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 피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언제부터 헐리웃 블럭버스터가 깊이있는 서사를 갖추었나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전개입니다.
논란이 되었던 페미니즘 요소는 주인공의 억압 중 일부인데, 그것도 그렇게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아요. 블랙팬서 때도 그랬는데, 마블은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입장이 정리된 수준까지만 다루고 그 이상 다루지 않기 때문에 관객에게 고민할 꺼리를 던져주지 않습니다. 블랙팬서에서 다루는 인종차별 문제도 과거에 사회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고 현재 사회가 명백하게 인정하는 수준에 대해서 잘못했지 않냐고 되묻는 수준에서 멈추고, 캡틴마블도 명백히 잘못했다고 현재 사회가 합의한 수준까지만 성차별 문제를 지적하는 선에서 멈춥니다. 이 전략이 현명한 이유는 상업영화로서 가장 안전한 지점에서 훈계하는 수준에서 딱 멈추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진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영화의 흥행에도 장애가 될텐데, 마블 제작진은 결코 거기까지는 건드릴 마음이 없는 듯 합니다.
브리 라슨이야 뭐 두말할 나위 없이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인데, 여기서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전체적으로 표정연기가 아주 좋더군요. 캡틴 마블은 우주를 날아다니며 포톤블래스트를 날리는 수준의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액션은 대부분 CG가 담당할 수 밖에 없어서 캐릭터 구축을 위해서는 일상적인 대화장면에서의 연기력이 중요했을텐데, 그 점에서 굳이 아카데미 수상자급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결과물도 좋았구요.
전반적으로 잘 만든 영화였지만,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듯 마리아 램보가 부조종사로 참여하는 대목의 대화장면은 어색했어요. 딸의 보호자로서 목숨을 건 작전에 참가하길 망설이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거기서 딸이 설득하는 화법이나 거기에 순식간에 수긍하는 과정 같은건 그냥 날림입니다. 이 부분은 영화의 완성도에 손해를 미치는 정도였다고 봐요.
뭐 그래도 총평하자면 훌륭한 상업영화입니다.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지금까지 마블 캐릭터들 기준으로는 밸런스 붕괴급이긴 한데, 마블은 필요할때면 다음 영화에서는 또 은근슬쩍 밸런스를 평준화시켜 묘사하기 때문에(제대로 묘사했다면 블랙위도우 같은 캐릭터는 여태까지 남아있을 수가 없죠) 엔드게임에서는 약간 너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